무안문인협회(회장 박일훈)와 남도문학회(회장 김 홍) 공동 주관으로 지난 8월 6일 오후 3시 목포 달리도 앞 해상에서 ‘2011년 선상작품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선상작품발표회는 무안문인협회 회원 15명과 남도문학회 회원 13명 등 총 28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동안 갈고 닦아 온 작품들을 발표, 지역문인들의 뜨거운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박일훈 무안문인협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우리나라 서남권이 국가의 전체 발전과정에서 보면 상당히 소외되어 왔지만, 이러한 척박한 환경일수록 문학의 꽃은 활짝 피는 법”이라며 이 지역 문인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김 홍 남도문학회장은 축사를 통해 “광주·전남지역 문학단체가 공동으로 선상작품발표회를 개최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써 뜻 깊은 행사”라며 “앞으로도 무안문인협회와 유기적인 공조를 통해 각종 문학행사를 공동으로 추진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조수웅 문학박사(前 전남문인협회 회장)는 발제강연에서 ‘구조주의비평’을 통해 주체중심의 근대적 사유체계를 비판하고 인간의 객관화된 ‘장(場)·구조’를 중시한 소쉬르(Saussure)의 사유양식이 오늘날 현대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설파했다.

  선상작품발표에 이은 선상친교 시간에는 이 지역 특산 수산물인 민어회 등 안주와 막걸리로 일배일배우일배(一杯一杯又一杯)하며 한층 무르익는 여흥을 저녁노을 속에서 붉게 태웠다.

  한편, 이날 행사는 식전행사로 최의묵 색소폰음악전문학원 최의묵 원장의 색소폰 연주가 있었으며, ▲개회사(정춘자 무안문협 사무국장) ▲내빈소개 및 인사(박일훈 무안문협회장) ▲축사(김 홍 남도문학회장) ▲발제강연(조수웅 문학박사) ▲선상작품발표회 ▲선상친교 ▲기념사진촬영 ▲폐회사 등의 순으로 진행했다.

/이민행 대표기자

▣2011 선상작품발표회 회원작품집
▶시(詩) 및 수필(隨筆)
 
◈ 시 - 나는 죽어서 바다로 가고 싶어요
공도식
 
달천 그 바다로 가고 싶습니다
그 갈매기와 함께 바다를 날고 싶습니다
그 파도들과 함께 춤추고 싶습니다
나는 죽으면 바다로 가고 싶습니다
 
신의 음성을 들려주던 그 바다로 가고 싶습니다
“넌 은자 하나를 잃고 가슴 아파하지만
난 수많은 사람을 사랑하여도 다 나를 버리고 가버렸단다
너는 은주 하나를 사랑하고도 가슴이 아프지야∼
난 지구상 수많은 영혼들을 사랑하여도 다 나를 버리고 가버렸단다
너는 지금 진주조개의 고통을 당하고 있느니라
네가 이 실연의 아픔을 겪어 보아야만이 나를 위한 전도자가 될 수 있단다.”
 

◈ 시 - 비 내리는 선창
김경애
 
비 내리는 선창은
젖은 눈물이기보다는
늦은 오후, 술에 취해 돌아온
아버지의 뜨거운 가슴 같은 것
비바람 치는 선상에서
아버지의 그늘을 생각해 본다
폭풍 같은 많은 날을 보내며
빗물처럼 우우우 울고 싶은 날 있었을까
꽃잎 같은 딸을 삼켜버린 바다를 바라보며
컥컥 목 놓아 울고 싶던 저린 날들조차
펼쳐놓고 뒤돌아보면 세상살이 다 아름다웠다
말하실 것 같은 아버지
지금도 가끔, 흔들리고 비틀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싶은 날 있으실까
유달산 자락 어딘가에서
술 취한 아버지의 뒷모습만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서 있던 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속 뜨거운 것들이 뭉클거리고
흐물흐물 비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 시 - 바닷가 저녁풍경
김대자
 
갈매기 나래접고
둥지에 기어들고
 
황혼이 짙어 가면
갈대가 살랑인다.
 
바둑판 염전에
하얀 까만 바둑알 점점이 노이고
작은 포구에 고깃배 서너 척이
비스듬히 눕는다.
 
망탱이 맨 아제비들
갯벌을 빠져나오면
마중 나온 아이놈들
망탱이 받아들고
요것저것 골라내어
어물전을 벌린다.
 
교회의 십자가는
핏빛으로 물들고
아이 업은 할매가
산등성을 넘는다
바닷가 저녁풍경
만상(萬像)을 수놓는다.
 
◈ 수필 - 미쳐 즐긴 멋의 감동
김민규
 
  어떤 텔레비전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를 봤다. 함께 시청한 아내의 말로는 요즘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인기 절정의 프로그램이라 한다. 뛰어난 가창력과 개성 만점의 중견들이 오디션 형식으로 진행하는 가요 서바이벌 쇼이다. 열창하는 가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청중평가단과 매니저들은 물론이고 시청자들의 호흡까지 쥐고 흔들어 댄다.

  혼신을 다한 노래가 끝나면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관객들은 얼이 빠져 기립 박수로 화답한다. 마지막 무대가 될 수 있다는 각오로 열창하는 가수들의 열정은 문외한인이 봐도 아름다운 무대가 분명하다. 가수의 열정과 청중의 열망이 시청자들을 긴장과 몰입의 경지에 오래 머무르게 하는 흡인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노래를 잘 부른 사람에게 상과 칭찬을 건네는 경연이 아니다. 두 차례 경연을 통해 출연자 일곱 명 중 꼴찌를 털어 내는 방식의 서바이벌 게임이다. 막강 참가자들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꼴찌를 면했으면 하는 진솔한 바람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오디션 형식의 이 무대가 중견 가수들의 집중력을 높이고 관객들의 긴장감을 유발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가고 있다. 결과는 다면평가 방식이라 끝나는 시간까지 하차할 한 사람을 예측할 수 없어 긴장감은 더욱 팽팽해지고 완성미는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도 자기를 온통 드러내야하는 평가와 경쟁을 수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숨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다 잘 아는 약점이라도 드러나면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자청한 이들도 제 순서가 올수록 흔들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러는 노래 중에 제 감정의 피치를 끌어올리지 못해 스스로 중단하는 고통을 자초하기도 한다. 현란한 무대와 객석의 환호성에 길들여진 이들도 무대울렁증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래도 일단 ‘어디 한 판 놀아보자!’며 자기최면을 걸고 나서면 무섭게 변하는 진정한 프로가 된다. 제대로 ‘미쳐 즐기는 멋의 감동’이 가히 예술이다. 

  조금은 유치한 듯한 타이틀 ‘나는 가수다.’를 되뇌어 보다가 ‘나는  누구인가?’에 생각이 미친다. 생각을 굴리는 동안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아득해지며 마음이 요란해진다.   

  이제껏 지고 살아온 이름,  ‘나는 아버지다.’, ‘나는 남편이다.’, ‘나는 동생이다.’, ‘나는 오빠다.’ ‘나는 선생이다.’, ‘나는 수필가다.’ ……. 한 몸에 짊어진 이름이 그 수를 헤아릴 조차 없다.  

  누구의 아버지로, 남편으로, 동생으로, 오빠로, 선생으로서의 나를 되돌아본다. 제아무리 되짚어 봐도 별로 신통한 게 없다. 내 진면목과 본래의 이름값은 항상 부등식이다. 무대를 사로잡은 후 결과를 기다리는 일곱 명의 출연자 속에 초라한 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이미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을 아낌없이 보여주었기에 후회가 없다 한다. 무대 위에서 미쳐 즐겼기에 한이 없다고 하는 이도 있다. 그들이 ‘미쳐 즐긴 멋의 감동’을 잔잔하게 전하는 동안 내 마음은 더욱 초라해져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 

  무대 위의 그들처럼 ‘나는 선생이다.’를 힘차게 외쳐본다. 내가 선생이라고 선언한 것은 진정성과 정체성의 의미가 더욱 확고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남은 내 삶의 밀도가 더 촘촘하고 세밀해지길 바라는 욕심이다. 아니, 교육의 무대에서 내려서는 그날까지 아이들과 함께 ‘미쳐 즐기는 멋의 감동’으로 살아가는 선생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시 - 그 꽃밭의 눈매
김자향
 
어제와 오늘이 밝으니 욕된 세상의 그늘마저
향기롭습니다
햇빛의 날과 달빛의 씨를 총총히 엮어 온
속잎, 새로 돋아나 사랑스러운 날
눈매의 꽃밭에서 향기에 젖은
남은 몇 날이
한줌 재가 되어 풀풀 날린다 해도
한 생애,
무너지지 않을 고독의 성에 홀로 갇힌다 해도
내 가슴
단내 번지는 아침,
순하디 순한 길 내어준 삶이 있기에
마냥 행복할 뿐입니다.
 
눈을 씻어 숲 하나 앉히고
황량한 들판을 지나 산하나 우뚝 세우고 나면
온 세상이 겸허해진다는 말씀
그 한 마디
그래요, 이제 바위틈 비집고 나와
눈을 뜬 영혼의 새가
하늘의 푸른 문을 열고 날아오릅니다.
 
◈ 시 - 죽부인
김정삼
 
올여름은 새로운 부인과
시원한 여름을 보내야겠다
그리고 마지막 사랑을 해야지
짧은 한철이지만
새롭게 서늘한 계절로 나야겠다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지만
항상 미소를 보내는 여인
바가지 잔소리도 하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속 깊은 죽부인과
동침한 날은 유난히 상쾌하다
꿈속에서 파고든 가슴
비어 있는 마음 채워주고
이별도 배신도 없는 사랑을
마음껏 할 수 있다
죽는 날 같이 떠날 길동무
올해는 죽부인과 두 손 꼬옥 잡고
여름을 시원하게 나야겠다.
 
◈ 시 - 2월에 내리는 눈
金昌辰

어여쁜 사람을 보면 대책 없이 설레는 마음처럼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늘 처음처럼 다가오는 너,
하늘은 눈 하나 우연히 보내주는 것으로
낮은 곳의 사람들을 축복하는 거야
생각 없이 미소 한 번 띠는?것으로
보는 사람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너처럼
소리 없이 찾아와서 이리도 설레게 하느냐.
탐스런 웃음으로
가슴팍으로 마구 뛰어들어
술렁이게 하느냐.
 
나비 떼보다 힘차게 벌떼보다 자유롭게
네 상처의 조각들이냐
반가워라
마음의 파편들이여,
스멀거리며 기어오르는 꿈틀거리는 영혼들이여,
20층 아파트 내 책상 앞의 유리창을 향해
너는 도무지 방향도 알 수 없게
자유자재로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공습해 오는구나.
나는 듣는다
저 소리 없는 구애의 몸짓을
살아 있다고, 몸부림치는 저 혼란스러운 질주를.
 
조금 전 보다 속도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몇 개의 길 잃은 눈발
아직도 갈 길 못 찾고 허공을 헤맨다.
 
◈ 시 - 고하도 뱃노래
海心 문창운
 
대마도 바닷바람 쓸고 와 삼학도 새 단장 다독이다가
진달래 간데없고
목포항 접안 어선 비릿한 냄새
입항한 연락선 ‘트롯’ 흥겹다
 
어기어차엉차 뱃노래 간데없고
숨 가쁜 엔진 소리 물살 가른다
좌우상하로 나는 흰 갈매기 애처롭게 운다
유달산 신록은 흰 바위들이 싸돌고
목포항 연락선은 ‘대마 등대’ 돌고 돈다.
 
◈ 시 - 파도는
박애금

마음 다 내어 주고
철석이는 파도에? 부딪으면
내 마음은 내 몸이 아니다.

밀려 간 바닷물에
세월도 흘러 보내고
빈 뻘밭에서 허우적 대다가
미끄러져 다시 일어나
하늘 한번 쳐다 보고
뒤 돌아 보니
밀려간 바닷물이 다시 나를 향하여 달려와 손 내민다.

파도소리 요란하게 밀려 왔다 밀려가고
세월에 부딪고 부셔진다.

살아 온 세월만큼이나 길고 긴 시간
아무리 퍼내려 해도
퍼 낼 수 없는 저 푸른 바닷물처럼
파도는 파도에 부딪고 부셔 져도
또 다른 파도를 친다

어머니 마음 같은 파도를 친다.
 
◈ 시 - 나는 천안함이고 싶지 않았노라
박일훈
 
구축함이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충무공 이순신으로 불릴 때
나는 천안함이고 싶지 않았노라
 
호위함이 부산함, 울산함, 마산함으로 불릴 때
나는 천안함이고 싶지 않았노라
 
초계함 벗들이 동해함, 진해함, 군산함으로 불릴 때도
나는 천안함이고 싶지 않았노라
 
잠수함이 장보고함, 최무선함, 이종무함, 손원일함으로 불릴 때
상륙함이 저마다 높다란 산봉우리의 이름을 달며
군수지원함이 너른 호수 이름으로 불릴 때
나는 결코 천안함이고 싶지 않았노라
 
끝끝내 나는 천안함이고 싶지 않았노라
기꺼이 청춘을 불사른 제2연평해전의 용사들처럼
마침내 나는 윤영하함이고 싶었노라
 
칠흑 같은 어둠 속, 쾅 쾅 연이은 폭발음으로
허무하게 두 동강이고 싶지 않았노라
외마디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나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노라
 
잔주름 굵어가는 어머니 볼에 얼굴 한번 부비고 싶었노라
잘 견뎌준 미더운 아내 손을 다잡고 고맙다 말해주고 싶었노라
여린 딸내미에게 아비의 다정한 눈물도 보여주고 싶었노라
말수 적어진 아들 녀석에겐 엄지손가락 세워 씩 웃어주고 싶었노라
 
어느 시인은 군인은 죽어서 말한다고 했으나
살아남은 자 부끄럽지 않으니, 굳이 환자복을 입히지 말라
암초 따위에, 적의 어뢰 한방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었다고
함부로 가벼이 말하지 말라
동해는 신라 문무대왕이, 백령도 서해는 이제 내가
저 거친 바다에 나서 영원한 흰 깃을 펼치노니
폭뢰 12발 어뢰 6발 미사일 6기, 온갖 중무장된 무기들은
조국의 안위를 위해 결코 삭지 않는 가슴으로 보듬고 가노라
 
나는 죽어도 천안함이고 싶지 않았노라
더는 구태여 내륙의 땅 이름을 빌리지 말지니
원컨대 살아 있는 자여, 부디 나를 백령함이라 불러다오.
 
◈ 시 - 유달산 정상에서
박종록
 
유달산 정상 쉬엄쉬엄 올라서서 국기게양대를 잡고
호남인의 정기 속에 피어난 신기한 노적봉을 바라보면
임진왜란 때 성웅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지혜로운 지략이
살며시 자랑스럽게 피워 오르고, 높고 깊은 뜻이 뿌듯이
우리들 마음속에 보름달 되어 두우둥실?떠오르지 않는가!

신령스런 유달산 정상에?서서 목포의 눈물을 불러 보고
서해의 바닷물과 남도의?굽이굽이 민물이 정겨이 만나는
남도의 젖줄 보고, 영산강 하구언을?넌즛이 바라보면
삿갓 쓴 사람의 모습, 신비스러운 갓바위가 보이는 구려!

목포의 명물,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우뚝?선 자태여
특이한 형상의 자연 조각품 갓바위 길이길이 영원하라
물길 막힌 영산호의 호염수에 뒤척이며 꿈틀대는 생명의 강
남도의 젓줄 영산강 옛 생명수가 목말라 애타게?그립다 하네.

영산강 하구언이 영산강 뱃길복원에 통문되어 황포돛배를 타고
낙조로 붉게 물든 환상의 영산강 갈대밭에 숨어 우는 바람소리랑
철새 도래지의 낙원의 동산 보고파 영산포 포구의 하얀 등대에 오르면
파아란 하늘이 살포시?열리고, 여러 고을 물결소리 정겨이 출렁이구려!
노적봉이 부른다, 영산강 황포돛배 유람선의 목포의 눈물 노랫소리를….
 
◈ 시 - 석 공
서오근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살을 에이는 혹한에서도
수분을 송두리째 말리는 폭염에서도
석공의 망치질은 쉬지 않았어라.
 
부딪치고 쪼는 파열음
파편은 분산되어 육신을 학대하고
망치 쥔 손에 맺힌 선혈이여!
뜨겁게 내리는 땀의 소나기여!
 
스물여섯 해의 고통으로
드높은 탑을 쌓고
오늘을 안식하는 장인이여!
영광있으라!
하늘의 은총 차고 넘쳐라!
 
◈ 시 - 동백꽃은 지고
유순희
 
신록이 우거지는 오후
동백잎 큐틴, 은빛 찬란함에
그 빛 반사경 살결 따뜻해져 오며
 
동백 숲에 함초롬이
하양 고깔을 쓰고 있던  붉은 미소는
뉘 가슴에 스러졌는지
타래에 얽힌 빛의 교감
환영幻影의 빛으로 아롱아롱
 
쪽빛하늘 가지 위에
점점 달아나는 흰 구름
동박새 지저귀는 환청소리
스산한 바람에 내 마음 실어
그대가 그리워져 모로 세우며
가슴꽃 피웁니다.
 
◈ 시 - 외달도에서
임우성
 
달리도 밖에 있어 바깥 달리
밖다리라 불렀던 작고 아름다운 섬
바깥외(外) 통할달(達), 사랑의 섬 외달도
 
외달도 호젓한 바닷가에
당신과 손잡고 서면
가없는 하늘과 바다 사이
가없는 세월의 한 시점
기적으로 만나 하나 된 우리
인연이 참으로 경이롭다
 
손잡고 있어도
애틋하기만 한 사람아
광대한 누리
티끌로 스치는 운명이거니
더 적절한 단어 찾을 수 없어
쉽고 흔한 이 말에 간절함을 담는다
 
사랑한다.
 
◈ 수필 - 나를 감동시킨 나의 정체성
임종진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면 자기 아닌 외적 현상을 들어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은 어떻고 고조할아버지까지 들먹여 자신의 고귀한 출생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고의적으로 그 정답의 정곡을 교묘히 피해 나가는 오답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왜 자기가 알몸으로 태어났다고 정확하게 말하려들지 않을까요. 사람이 옷도 입은 것 없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창피해서일까요. 아니면 남다르게 위대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사실인 양 강조하거나 조작하기 위해서 일까요. 여기서는 유전 인자가 어떻고 출생원인이 어떻고 하는 것은 차치하고 동물적인 독립개체로서 파악된 것이란 걸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 대를 이어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이미 낡은 개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을 준용해서든 아니든 지금은 인권을 존중하여 누구나 날 때부터 살아갈 권리가 있고 평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정체성은 성숙한 인간에 있지 않고 알몸으로 태어난 때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행히 평생 동안 나에게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묻는 사람이 없어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마는 이 기회에 자문해 봅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이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저 역시 알몸으로 태어난 나 자신을 두고 말한다면 이것 말고도 나 아닌 외적 요인으로 존속해 왔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숫제 제 모습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단 나의 정체성을 태어날 때로 한다면 그 이후에 내가 얻은 재물의 소유나 지식의 습득을 비롯한 모든 의욕의 성취는 내 스스로가 아니고 타인으로부터 취했거나 모방에 의한 것으로서 전혀 남의 덕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저는 평생을 짬이 생길 때마다 너라는 인간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나 아닌 내가 또 존재한다고 하면 이를 수긍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 아닌 내가 있을 수 있을까요. 참 일 없이 별 생각을 다 한다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존재는 내가 태어남으로서 비로소 생겨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는 죽음으로서 없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사실이 이론상 존재한다고 욱이는 데야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질 않겠습니까. 이것이 허상이든 흔적이든 나의 존재에 상관없이 남아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나 아닌 내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저는 사는 동안 되도록이면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지식을 습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목록을 드려다 보니 나 아닌 나로 살게 해 준 부모님 그리고 학교 선생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알몸으로 태어난 나로서는 갖은 것이 많은 이런 모습은 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되돌아 보건데 나 아닌 나로 살아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의 정체성은 자연 상태라고 하겠지요. 실제로 내가 산 것은 나 자신 정체성만 가지고 산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나 자신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질 않았겠습니까?
 
  나 아닌 나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스스로 독립개체로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히 일도 했습니다. 하지만 본래 나는 알몸이었으니까 이것은 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 아닌 나에게 무심코 보내 준 친구의 웃는 시선, 그리고 무시해도 상관없을 이웃의 소소한 정이나 조그마한 사랑과 친절 같은 것으로 나 아닌 내가 성숙해 왔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나를 오늘 이렇게 있게 해 준 모든 이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 수필 - 청개구리와의 동거
정정길
 
“개굴 개굴 개굴”
“개골 개골 개골”
“개글 개글 개글”
청개구리가 울어대는 소리를 어찌 문자로 나타낼 수 있을까마는 높낮이며 크기가 모두 제각각인 것으로 봐서 꽤 여럿이 몰려와 있는가 보았다.
해마다 때가 되었다 하면 녀석들은 어김없이 나타나서는 앞창에 바투 붙은 울타리에 앉아서 울어대었다.
지금이 초저녁인가 갓밝이인가를 가리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늙은데기 아내가 먼저 짜증을 내며 꿍얼거렸다.
“저 눔의 개구리 좀 제발 쫓아 버릴 수 없남?”
“뭘, 난 듣기 좋기만 한데.”
그리고는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기 일쑤.
시끄러워서 맘을 푹 놓고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일어난 사단이다.
그렇다고 제가 좋아 찾아든 미물에게 농약을 쳐서 죽일 수 없고, 회초리 들고 나가 소리 내지 말라고 겁을 줄 수도 없으며, 생울타리를 깡그리 베어내기는 더욱 싫은 일이니 꾹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맘속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새겨 두고…….
그런데 금년에는 어인 일인지 유난히 많은 녀석들이 울타리를 타고 앉아 극성을 부리건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싫고 마뜩찮은 일을 자꾸만 겪고 보면 짜들고 이골이 나서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마음에 새겨 두지 않는다더니 지금 이 상황이 꼭 그 짝인 셈이다.
청개구리가 울어대면 비가 내릴 전조라느니, 부모 생전에 말썽을 부렸고, 사후가 되어 묘가 빗물에 휩쓸릴까 걱정하느라고 저렇게 울어댄다는 둥의 이야기는, 세월이 세월을 먹은 탓인지 옛날에 벌써 잊었다.
녀석들이 울어대면,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되려는가 보다.’ 하는 정도로 치부하는 길로 잊고 있었고,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조용해지면 모두 제 갈 길로 떠났는가 보다 하면서 지냈었다.
녀석들도 우리 내외의 이런 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언제부턴가 아예 거실까지 차지하고 앉아서 제법 목청을 높인 것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아이들이 찾아오면 온통 난리판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저적거릴 정도로 자란 아이들이 가까이 가서 함께 놀자고 손짭손을 하면 바로 곁에 있는 창유리에 넓적한 발바닥으로 철석 달라붙어 엉기적거리며 서서히 기어오르기는 하지만 결코 서두르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장난을 건 아이가 싱거워 물러나면 원래 제가 앉았던 석창포 사이로 풀썩 뛰어내려 앉는다.
그러나 이제야 겨우 갓 밟을 정도로 어린 것들이 가까이 가면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 크고 검은 눈을 감았다 떴다를 몇 차례 거듭하다가 이내 움쩍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올챙이를 나눠 가는 일까지 생겼다.
올해도 올챙이를 가져가겠다고 그릇을 내밀면 작년에 가져간 올챙이에서 청개구리가 나온 걸 봤는지를 먼저 물어보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고 알아서 가져가라고 답을 던지는 길로 잊고 말았다.
이렇게 청개구리가 거실까지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제법 오래 전일이다.
두텁지만 옅은 색깔로 생울타리를 만든 송악에 햇볕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유월 어느 날, 창밖에서 느닷없이 청개구리가 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흔해 빠진 청개구리로 여기고 대수롭잖게 여겼었는데 목청을 뽑아대는 품으로 봐서 날마다 숫자가 늘어가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소리도 제각각이었다.
위치는 물론이지만 높낮이가 그렇고 소리의 크기도 모두 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데기 아내가 질겁하며 수반을 가리켰다.
돌이 둥글면 거기 맞춰 둥글게, 길쭉하거나 갸름하면 그 모양새에 맞게, 돌이 높으면 울을 높게 만들고 낮은 돌은 여기 맞춰 옹기로 수반을 맞추고 그득하게 물을 담았는데 거기 심은 석창포 틈으로 청개구리가 자리를 잡았고, 물속에다가는 알을 넉넉하게 낳았던 것이다.
어디에서 찾아와 거기에 그렇게 많은 알을 낳았는지 신통할 뿐이었다.
하기야 야산 코숭이에 엎딘 집 바로 뒤에 작으나마 밭이 있고 산복에는 덤불도 무성하건만 산새는 굳이 이를 마다하고 해마다 내려와 울타리에 둥지를 틀 정도이니 청개구리가 덤벼든다고 해서 신통하다 생각할 것 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울타리 밑 그늘에 줄줄이 늘어놓고 날마다 들여다보며 손질하는 수반에 알을 낳았다는 사실이 그런 것이다.
수반 안에 이끼가 있고 풀이 있으면서 맑은 물이 넉넉해 거기서 새끼를 친다고 한들 누가 나무라고 말릴 수 있을까마는 언제 어떤 사정으로 물이 바싹 말라 올챙이가 죽게 될는지 모를 열악한 환경인 줄을 어미는 하마 알고나 알을 낳았을까.
갓 낳은 알은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유독 새까만 색깔인지라 그게 좁쌀이 아닌 청개구리 알인가 보다 하지 얼른 봐서는 구분하기가 영 어렵다.
그 알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실밥 같은 뒷다리가 생기고 또 나달 사이에 새까만 좁쌀은 깡그리 사라지고 맑은 물만 덩그러니 남았다.
어제 오후에 석창포를 손질하며 닳아 없어진 물을 보충할 때만 해도 올챙이들이 분명히 오글거렸는데 어느새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별로 넓지 않은 거실이 하 허전하기도 하거니와 심심하기조차 해서 석창포 수반 서넛을 거실 귀퉁이에 옮겼는데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쫓아와서 자리를 잡더니 두어 차례 목청을 높이고 알을 잔뜩 갈기는 길로 흔적이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서 깬 녀석들도 여우콩 만해지면서 발 넷이 모두 생기면 제 어미처럼 그랬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제 갈 길로 떠날 작정을 미리 해 두었으면서 참빗장수처럼 거실까지 침범하여 제 부모에게 눈물을 쏟으며 한껏 높였던 목소리를 집안 가득 남겨놓고 떠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시 - 고향 집 칠월
정춘자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그리움을 안고
찾아온다고 했지
 
진주 같은 모래알에 사각사각 발자국 내고
칠월칠석 전설을 그리는 허연 은하수를 세며
밤하늘에 추억을 만들자고 했으련만
돛단배는 다시 파도 따라 밀려가고
 
환상에 모래 그림은 다시 지워지고
상큼한 청포도는 주절주절 열렸는데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 함빡 적셔도 좋으련만
 
내가 바라던 손님은 파도 따라 밀려가고
모래위에 추억은 다시 지워져
갈매기의 임 찾는 소리 기웃기웃…
배 고동 따라 멀어져 가네!
 
◈ 시 - 하늘 닮은 바다
조수자
 
하늘을 바라보다
하늘을 닮아버린 바다
 
그 바다에
하늘을 닮고 싶은
내가 섰네
 
바다가 그러하듯
하늘 깊고
하늘이 그러하듯
바다는 넓어
 
푸르디푸른 언어로
진실을 노래하면
 
하늘 닮은 바다에서
나도
작디작은
언어가 되어 잠기네.
 
◈ 수필 - 꽃을 불러내는 바람처럼
황경자
 
  사랑의 선서를 만당의 사람들 앞에서 서약했던 젊은 시절에 아름다운? 면사포를?썼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학교에 부임하여 사회생활을 한지  2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대학 교수님 사모님 중매로 맞선을 보게 되었다. 침이 마르게 칭찬했던 그분은 서울 K대 이공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훌륭한 가문과 인품은 J시에서 주위 모든 분들에게 널리 알려져 질 정도로, 좋은 집안에서 잘 성장했음을 자세히 설명 해 주셨다. 이렇게 미리 귀뜀해 주신 것처럼 과묵하고 점잖은 청년이라는 인상을 첫 대면에서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평생의 운명을 가늠하는 중대한 결혼을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어서 요모조모로 재며 미루다가 그냥 엉겁결에 시간이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중매를 통해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은 참으로 어색한 만남이어서 어렵기만 했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기에 많은 망설임을 겪었는지 모른다.?요즈음 젊은이들의 표현처럼 감성의 필(feel)이 잘 꽂혀지지 않았다. 
 
  여자의 운명이란 좋은 배우자에 의해  천지개벽 하듯이 삶의 형태가 바꾸어 질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삶의 정도(正道)를 외면했던 무지(無智) 의 소치라고 해야겠다.

  서릿발이 내리던 늦가을 날 이었다. 결혼 적령기를 놓치지 않고 시집을 보내려는 부모님의 성화 때문에 또 선을 보게 되었다. 1년 전에 중매해준 그 사모님의 주선으로 다시 똑 같은 그분을 만나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퇴근하고 오후의 약속시간에 맞추어 음악다방으로 유명했던 Y 다방에 들어섰다. 기다리고 앉았다가 일어나서 내 앞으로 불쑥 다가 왔을 때??오늘 만나는 주인공임을 알아보는 순간 너무 놀라워 말을 할 수 없었다.
 
  미리 알고 올라왔다고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하였다. 그동안 몇 번의 맞선을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믿음직스럽게 생각했던 분을 다시 만났기에  구면의 만남은 우선 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솔한 대화를 쉽게 나눌 수 있었고 결혼문제도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드디어 배우자를 선택하기로 하고 운명의 고삐를 맡기게 되었다. 구정을 넘기지 않으려 하신?양가 어른들의 서두름으로 그해 겨울 양력 1월27일 온 천지가 흰 눈으로 쌓인 날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맡으신 분은 이미 고인이 되신 ‘이을호’ 박사님인데 워낙 덕망 높으셔서 삶에 귀감이 될 주옥같은 말씀을 해 주셨다, 

   ‘이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성하거나 병들거나 평생을 변함없이’

  찬물을 끼얹듯이 장내가 숙연했던 분위기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회상된다. 결혼하고?환경이 확 바꾸어진 현실을 실감하면서 학교에 사직서를 냈다. 새로운 삶의 현장교실인 시댁에서 맏며느리 수업을  충실히 받았다. 낯선 환경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난제들을?체험하며 어려운 고개를 넘고 또 넘어왔다.

  의욕적이고 발랄했던 젊음의 그 시절에 중매로 만난 우리는 변함없는 잔잔한 사랑으로 앞만 보고 먼 길을 걸어왔다. 청신한 감수성은 유독 옛날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를 변함없이 연연히 흐르게 했으며 섬기는 마음가짐으로 그를 내조하며 끈기 있게 살아온 삶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 옛날에 결혼시절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중매하신 사모님께서 “이 사람과 결혼하면 세상 어려움 없이 요람에 눕혀놓고 자장자장 자장가를 불러줄 것이며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라도 따다 줄 것이다.” 라고 하신 그 대목에서 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깔깔거렸던 일이 지금껏 민망스럽기만 하다. 물론 그이의 자상하고 온유한 성품을 강조하려는 뜻이야 잘 알지만 마치 무성영화시대의 변사를 연상케 되어 그렇게 무례를 범했던 것 같다.     

  결혼하면 천 가지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독신자에겐 아무런 기쁨이 없다. 아마도 이 말은 결혼의 긍정을 내포 하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여 본다. 햇솜처럼 깔리는 봄 아지랑이 같이 꿈꾸었던 결혼을 다시 생각해본다. 젊은 시절에 예상하지 않았던 어려운 고비를 만났을 때 요람 속에 눕혀놓고 자장가를 불러주며 밤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것이라는 기대가 절실했다. 그이를 원망하면서 투정부리고 타박했던 부끄러운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왁자지껄했던 삼남매의 여운은 아직도 귀에 맴맴 돌며 눈에 아른아른 거린다. 자식을 기다리는 어버이의 심정으로 돌아간 듯싶어 세월이 많이 흘러갔음을 실감한다. 지나간 시절이 빛이 바래어지고 한때의 열정도 퇴락하련마는 마음의 창문만은 활짝 열어두고 싶다. 쉼 없이 부풀어지는 용기가 솟아나 새로운 도전을 꿈꾸어본다.
 
  내일의 삶이 얹히는 내 모습을 거울 속에서 만나본다. 삶이 결코 무상하기만한 허송세월은 아니었음에 진한 연민을 느낀다.?남편과 자식들이 잘 살 수 있게 굳건한 발판의 대지를 만들어 주시기를 빌었던 그 시간들이 끝내 숭엄한 축복으로 다가와 마음이 편안하다. 

  사람에게는 흡족한 시간과 자유롭게 일이 주어지며 계획하고 실천 할 수 있는 생동감을 느낄 때  감사의 염(念)에 잠긴다. 결혼을 해서?천 가지 고통이 따름을 이미 체험 했기에?그 고통을 인내하면서 대가로 바꾼?인생의 기쁨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늦게나마?깨닫게 된 것을 명예스러운  금딱지 훈장을 받은 것처럼 따뜻함을 느낀다.

  오랜 결혼생활을 했기에??새삼스럽게 희로애락의 참 의미를 되새겨본다. 인격이라는 것도 사랑과 인내심의 결정체라는 것을 실증적인 체험을 통해 터득하게 되었다. 공기오염이 없는 전원이나 싱그러운 나무숲을 헤치고 들어서는 산길에서 매번 감격스럽다. 눈감고 귀 기울여 보면 대지(大地)의 힘찬 생명들이 장한 함성으로 소리침이 크게  들려온다.

  꽃을 불러내는 바람처럼?그동안?미루기만 했던 사랑의 고백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싶다.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관용하고  연민하면서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싶다.
 
◈ 구조주의비평
조수웅(문학박사, 前 전남문협 회장)
 
   “이건 그냥 해결될 일이 아니야, 구조적 문제라고.”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이는 단선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전체구조를 파악해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얼굴에 여드름이 생겨날 때, 생기는 쪽쪽 짜기만 한다고 여드름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몸 전체 호르몬 기능을 조절해야 문제해결이 가능하다는 의미다.(홍수와 치산치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구조주의란 무엇이고, 나아가 문학비평에서 말하는 구조주의는 무얼까?
 
  구조주의란 ‘사물들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겨난다고’보고, ‘진정한 구주주의자에게 사물들 간 관계 이외에 실체는 없다.’(구조주의 4총사 레비스트로스, 정신분석학자 자크라캉, 철학자 미셸 푸코,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는 것이고, 그 구조주의에 입각한 문학비평이 바로 ‘구조주의비평’인데, 이를 보다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그 바탕이 되는 <구조주의란 무엇인가>(이정우, 2003 : 22～24)를 먼저 소개한다.
 
   ‘현대사상’을 어디에서 끊어 이야기할 것인지는 분명치 않은 문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2차 세계대전 이후, 1968년(노동자 운동과 더불어 학생ㆍ여성ㆍ반전 운동 등 각종 ‘현대적’ 사회운동이 일어남. 공산주의권과 자유주의권에서 동시에 발생한 사실이 더욱 의미심장함) 이후 등, 여러 답이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일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사상들을 ‘현대사상’이라 부를 것이다
 
  현대사상은 맥락에 따라 후기구조주의(구조주의 극복을 위해 등장한 사유라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모던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사유라는 점에서), 프랑스 사상(주로 프랑스에서 배출된 사상이라는 점에서), 탈근대 사상(근대가 남긴 병폐들과 싸운 사상이라는 점에서), 68사상(1968년 혁명을 기점으로 형성된 사유라는 점에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딱히 일반화하기 힘든 각기 독창적 사유들이다. 그럼에도 이들 사이에는 분명 일정한 연계성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구조주의’라는 사유를 통하고 그것과 대결하면서 형성된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상의 입구에는 구조주의가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철학’이란 대체로 16세기 서구에서 형성돼, 17세기에 본격화했으며, 18세기에 대중화를 거쳐, 19세기에 만개(滿開)한 동시에 변형되기 시작한 철학적 흐름을 말하다. 물론 근대철학은 이미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삶의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근대는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한 세계관의 변화,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삶의 변화, 민주주의의 발달로 인한 대중사회의 도래를 비롯, 몇 가지 현상들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런 다양한 현상들 밑에서 작동해 온 철학적 원리는 곧 ‘주체의 철학’이다. 과학기술, 자본주의, 민주주의, 주관화한 문화예술……. 모두 ‘주체’라고 하는 인식론적ㆍ존재론적 원리를 토대로 한다. 그러므로 근대철학을 간단히 ‘주체철학’이라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철학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인식, 의미, 역사의 가능근거(可能根據)를 신, 하늘, 운명, 섭리 등이 아닌 ‘인간 주체’로 부르기도 하므로, ‘선험적(선천적인 직관과 사고) 주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서구의 근대철학이란 ‘인간을 주체로 세운 철학’이다. 칸트는 인간 인식을 ‘신이 영혼에 넣어 준 진리의 씨앗’이나 수동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인간 의식의 능동적 구성작용으로 이해했다. 헤겔은 역사를 인간 주체가 만들어 나가야 할 하나의 ‘작품’으로 보았다. 후설은 인간의 의식을 세계로부터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했고,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존재를 이해하고 존재를 담보하는 존재로 보았다. 사르트로는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 보았고, 메를로 퐁티는 인간 신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런 철학자들에서 우리는 ‘선험적 주체의 철학’이 변화해 간 궤적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서구 근대철학은 주체ㆍ이성ㆍ자유ㆍ역사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런 가치들은 인류 역사를 크게 바꿔놓았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의 주체철학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학적 합리성의 추구는 세계를 탈색시켜 버리고, 기술의 발달은 모든 사물을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자본주의와 기술의 결합은 환경을 황폐화했으며, 사람들의 마음까지 삭막하게 만들었다. 대중사회의 도래는 모든 고급한 가치들을 몰락시키고, 저급한 문화들이 세계를 휩쓸도록 했다. 민주주의는 우중(愚衆)의 변덕에 좌우되는 정치를 탄생시켰다. 탈근대 사유들은 이런 근대라는 시대가 남긴 상처들을 치유하고 새로운 시대를 사상적으로 모색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생겨났다.
 
  구조주의는 주체 중심의 문화가 빚어낸 폐단에 맞서 새롭게 모색된 사유양식이다. 그 발달에는 여러 맥락이 있지만 굵직한 것들로 마르크스ㆍ니체ㆍ프로이트의 유산, 바슐라르ㆍ게루 등의 인식론, 소쉬르에서 연원한 구조주의 언어학 등을 들 수 있었다. 마르크스ㆍ니체ㆍ프로이트는 주체 중심의 근대 사유를 거부하고 인간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했다. 바슐라르와 게루는 19세기 이래 탈합리주의 사조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형태의 합리주의를 마련함으로써 구조주의를 향한 길을 예비했다. 더 직접적으로, 소쉬르에서 연원한 구조주의 언어학은 구조주의적 사유의 방법론적 토대가 됐다.
 
  구조주의 사유양식에는 어떤 기본적인 특징들이 있을까?
 
  첫째, 구주주의는 인간의 의식, 내면, 주체성, 정신ㆍ마음 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장(場)ㆍ구조’에서 출발한다. 인간을 바깥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그 장의 구조를 논할 때 관계의 사유를 구사한다. A, B, C 각각에 내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A와 B의 관계, B와 C의 관계에서 의미가 나온다는 시각이다. 토템의 예를 들어보자. 거북ㆍ독수리ㆍ곰을 토템으로 하는 세 부족이 있을 경우, 그 각각에는 큰 의미가 없다. 거북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과 거북이라는 동물 사이에 어떤 내재적ㆍ필연적인 관계는 없는 것이다. 의미는 이 세 토템 사이의 관계로부터 성립한다.(‘중위’라는 계급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와 대위라는 계급의 관계로부터 성립한다.)
 
  셋째, 이런 식의 법칙성은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에 이끌려 사는 심층적 법칙성이다. 이 때문에 구조주의는 자연히 ‘무의식’을 중시하며, 무의식의 층위를 파고 들어가게 된다.
 
  이런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 입각해 자기 분야를 연구한 뒤, 그 연구 성과에 사상사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이 레비스트로스다. 과학은 사실의 확인, 법칙의 발견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어떤 과학적 성과를 토대 삼아 세계와 인간, 가치에 대해 넓은 사유를 펼치면, 그 과학적 내용은 ‘사상적 함축’을 띠게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일차적으로는 인류학자이지만, 자신의 인류학적 발견에 철학적 내용을 부가함으로써 사상사적 위상을 부여받았다.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은 레비스트로스를 통해 처음으로 중요한 사상사적 전경(前景)을 차지하게 된다.
 
  이에 비해 문학비평으로서 구조주의란, 1950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작품 감상 방법으로, 포스트구조주의와 함께 20세기 후반기 문예비평계를 주도 하였는데, 좁은 의미론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슬픈연대>에 명시된 스승= 프로이드·마르크스·지질학)가 일련의 저서(구조인류학 1958, 야만적 사고 1962)를 통해 보여준 방법론을 말한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구조주의는 60년 전후 소쉬르의 언어학적 성과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기본 사상은 세계 자체가 이중적이며, 인간의 사고도 세계를 반영해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이원적 대립’ 또는 ‘이항 대립’(binary opposition, 또는 변별적 자질)이라고 하는데, 자연이든 문화든 세계를 구성하는 이원적 요소들끼리의 대립 속에서만 의미가 발생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주의(주체 중심의 문화가 빚어낸 폐단에 맞서 새롭게 모색된 사유양식이다. ①객관적인 ‘장場·구조’에서 출발-인간을 바깥에서 보고자함 ②관계에서 의미가 나옴 ③무의식 중시-심층적 법칙성, 낮 익은 것에 싫증)의 중심 개념이 ‘구조’라는 방법과 유럽의 근대 형이상학(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쳐 일대 혁명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신이나 이성 또는 이데아(idea,이념)
 등과 같은 어떤 특정의 관념이나 원리가 아닌 구조적인 방법으로 사물을 분석하는 과학적인 방법의 하나로써, 이념이라기보다 방법이며 인문과학 전반에 걸쳐 새로 도입된 인식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일체 사유와 언어 및 행위의 근거는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구조’(성씨, 생일, 사망일 선택권)라고 본다. 이를테면 사물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이성이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이면서 불가사의 한 객관적 ‘구조’에서라고 여긴다. 이는 무엇을 표현하고 기능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되고 기능하는가를 설명하는데 주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구조주의에 의하면 작품이란 작가 정신이 빚어낸 것이 아니고 언어의 선택과 결합으로 빚어낸 것이라고 본다. 즉 인간사고 그 자체가 구조적이므로 구조적 사고를 통하지 않고는 외부세계의 경험이 불가능하며,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 같아도 그 속에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처음 만나면 어색하다가도 자꾸 만나 친숙해짐에 따라 구조적 인식이 차츰 달라지고(낯익기), 오랫동안 못 마나면 다시 어색해지는 이치(낯설기)와 같다. 그래서 흔히 구조주의에는 ‘주체의 사망’이나 ‘인간의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구조주의의 중심 목적은 문학을 모든 수준에서 언어처럼 조직화된 것으로 보아 그 유사성을 밝혀내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의 문학은 일반적인 문학의 속성을 기술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조란 대상을 구성하는 요소들-또는 체계-만으로 이루어진 자율세계이다. 그래서 언어는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구조화된 고도의 체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