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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고蘆嶺鼓 - 함평양민학살사건과 天降喪亂
노령신문 CEO 편집인 이민행
 
CEO 편집인 이민행 기사입력  2013/12/0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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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1개월 후 인민군 6사단이 7월 23일 새벽 함평에 진주했다. 이후 인민공화국(인공) 체제로 조직을 개편했다. 군·면·리·마을단위로 노동당 책임자와 여맹위원회, 자위대·유격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인공 시절을 오래 가지 못했다. 그해 10월 15일 국군 11사단 20연대가 광주에 진주한 후 23일 함평을 수복했다. 이때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불갑산(佛甲山)과 군유산(君遊山)으로 들어갔다.

 전남 각 지역에서 쫒겨 온 빨치산들은 해보면 모악산 용천사에‘조선인민유격대 불갑산 사령부’를 설치하고 일명 불갑산 중대, 군유산 소대로 불리는 빨치산들이 함평군과 영광군에서 활동했다.

 국군 11사던 20연대 2대대 5중대는 12월 2일 빨치산과 전투 중 장병 2명이 전사했다. 6일 5중대는 보복에 나서 나산면 동촌리·장교리(長橋里) 남녀노소 주민 70명과 7일에는 ‘남살뫼학살’이라고 불리는 월야면 월악리 주민 130명을 무차별 총살하는 咸平良民虐殺事件(함평양민학살사건)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11사단 최덕신 사단장의 ‘견벽청야작전(堅壁淸野作戰)’이 발단이 되었다. 최 사단장은 중국 장개석 군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어 장개석 군대는 견병청야작전에 익숙해 있었다. ‘견벽청야’란 중국 병법으로 “작전권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전원사살과 사람들의 주거 공간마저 모조리 소각한다”는 방어 수단이다.

 이에 앞서 11사단은 1951년 10월 23일 함평 수복작전에서 함평읍 수호리 52명, 진양리 28명 등 많은 희생이 있었으나 육군본부가 발행한 공비토벌사에는 누락되어 있다.

 이어 12월 10일에는 나산면 외치리 주민 21명을 총살과 이듬해 1월 14일 해보면 상곡리 주민 50명을 기관총 등으로 사살했다. 당시 이오섭 나산면장은 1월 15일(음 12월 8일) 5중대를 찾아가 “주민들은 우익도 좌익도 아닌 선량한 백성이다. 죽임을 당해야 이유가 없다,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호소했다.

 1951년 2월 18일(음력 1월 14일) 대보름 전날 저녁에는 불갑산에서 함평군 해보면·신광면·나산면, 장성군 삼서면·삼계면, 영광군 묘량면·불갑면 등 7개 면을 포위하고 가옥을 불사르며 일명 ‘대보름작전’을 개시했다. 희생자 500명이 넘었다. 이곳도 빨치산은 빠져 나가고 민간인 희생자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다음 날 2월 19일(음력 1월 14일) ‘대보름작전’은 신광면 군유산 작전을 개시했다. 군유산에는 빨치산 소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전날 불갑산 전투에서 빨치산들이 군유산으로 피신해 왔었다. 마을 주민은 마을 주변을 경찰의 지시로 울타리로 둘러치고 생활했다. 군·경은 대보름을 새기 위해 준비하는 군유산 아래 소재하고 있는 함평군 신광면·손불면 주민과 영광군 염산면·군남면 주민들을 군유산으로 입산시키고 가옥을 불사르고 기관총 등으로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수백년 조상을 모셔온 함평이씨 제각도 불 질러 버렸다. 이날 주민들은 자갈 더미를 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총알을 피해 살아남기도 했다. 빨치산은 거의 빠져 나가고 희생자는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국군이 퇴각한 후 희생자 가족을 찾기 위해 동이 터 산자락을 보니 수백구의 시체가 뒤엎어져 있었다고 한다. 군유산 희생자의 증언을 해 줄 당시 목격자는 거의 고인이 되어 안타깝다.

 함평양민학살사건 관련 국회 진상규명활동이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함평지역 김의택 의원의 발의로 시도되었으나, 이듬해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서며 유가족과 관련자들이 이적행위자로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93년 제1회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고 진상규명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국군 전사자 2명의 위령비도 세웠다. 그러나 위령제를 모시며 빨치산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배제하고 있다고 한다. 좌우익 이념대립이 남긴 민족의 아픔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목이 잘려 벌교역 광장에 걸린 ‘염상진’의 목을 보면서 ‘염상구’는 이렇게 외쳤다. “저거 내리라. 살았을 때 뽈갱이제, 죽어서도 뽈갱이디냐”라고.

 한편,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대보름작전 이전에 빨치산들은 신광면 송계부락 김00 씨 일가족을 타살했고, 해안동 한00 씨는 구덩이를 파고 나무에 메달아 끔찍한 살상을 자행했다.

 함평사건희생자유족회는 군경에 의해 희생된 불갑산 자락 16곳에 ‘함평 양민 집단학살희생지’란 표지석을 세웠다.

 시경 탕지십(蕩之什)에 “何辜今之人(하고금지인) 天降喪亂(천강상란)”이라고 했다. “사람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가, 하늘이 죽음의 난을 내리셨다”고. 喪, ‘죽을 상’ 자다.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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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2/09 [15:10]  최종편집: ⓒ ror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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