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 시무국가’ 새기자
亦悖而入, 자신을 속이면 그 말이 되돌아온다
대한민국 8월은 역사학적으로 매우 가슴 아픈 시련이 많은 달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2년 후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로 2개월여 후 8월 18일 정부를 부산으로 이전하는 동족상쟁의 빼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1910년 8월 22일은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불리는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바치며 민족적 치욕과 수탈이 36년 간 이어지는 통한의 시절을 겪었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이라는 악랄한 악법을 만들어 독립투사 25,000여명을 고문하고 투옥하고 사형장으로 보내는 극악무도한 짓을 자행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으나 외세에 의한 광복으로 다시 미국 군사정부가 대한민국에 설치돼 자주적 정부 수립을 못하고 미국 군정은 1945년 9월 7일자로 ‘대한민국을 점령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한다.
이때 포고령은 “▲오늘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 지역을 점령한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지역 및 지역주민에 대해 군정을 실시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 행동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 ▲군정 기간 중 공식 언어는 영어로 한다.”라고 규정했다.
민주당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해방 후 초기에는 미군이 점령했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역사의식 부족’이라며 민주당 대선 주자는 물론 야당 대선 후보들도 맹폭을 가하자 광복회는 당시 포고령 문건을 공개하고 ‘점령이 맞다’는 유권해석을 내림으로서 일단락되었다.
1945년 9월 7일 미국 포고령이 점령한다고 명확히 발표했는데도 점령이 아니라면,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도 합방이 아니라는 말인가?
대학에 “言悖而出者(언패이출자) 亦悖而入(역패이입)라, 도리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거슬리는 말이 되돌아온다”고 했다. 대통령 하겠다는 자들이여! 패악질하는 입 좀 다물고 살자. 민주당 후보 중 자신을 보좌하던 가족에 평생 아픈 상흔을 주고도 깨끗한 척 하니 볼썽 사납다. 아무리 지지율에 급하다고 자신을 속이면서 까지 상대를 공격한다고 꿈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자칫 孤立無依(고립무의), 고립되어 의지 할 데가 없게 된다.
◈1592년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 중 하나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둬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의 해상 침입에 쐐기를 박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순신 장군은 1953년 “國家軍儲 皆?湖南 若無湖南 是無國家(국가군저 개고호남 약무호남 시무국가), 국가 군량을 호남에 의지했으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왕위 자리 지키기에 전전긍긍하는 선조와 그 일당인 윤두수 등의 모함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하고 白衣從軍(백의종군)이라는 치욕을 당한다.
여당과 야당에서 내년 대통령을 꿈꾸며 수십명의 후보들이 자기만이 대한민국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을 구제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민주당 후보 중에 백의종군의 입지에서 다시 나라를 구했던 이순신 장군 같은 후보가 있어 다행으로 여긴다.
논어 이인편에 “唯仁者能好人 能惡人(유인자능호인 능악인), 오직 어진 사람만이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고 했다. 민주당 후보 중에 진정 서민대중을 위한 후보가 있어 위안으로 삼는다.
◈1979년 YH여공 강제 해산
1979년 8월 11일은 YH무역 여공들이 농성중인 서울 마포구 도화동 신민당사에 새벽 2시경 서울시경 산하 1천여 명의 정사복 경찰관들이 들어가 4층 강당에서 지난 9일 오전부터 농성 중인 여공 1백72명과 여공의 연행을 제지하는 신민당원 26명을 경찰서에 강제로 연행, 수용했던 날이다.
이날 여공 김경숙 양(21)은 왼쪽 팔 동맥절단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신민당 박권흠 대변인 등 신민당원들과 취재 기자, 여공, 경찰관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총재 직무를 정지당한 후 국회의원직 제명을 당했다. 부마민주항쟁에 도화선을 당겼고, 10.26 사건이 발생해 유신 공화국이 붕괴되는 듯 했으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며 ‘서울의 봄’은 오지 못했다.
◈1980년 최규하 대통령 하야
1980년 8월 16일은 대통령직에서 하야를 선언하고 물러난 날이다.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2월 6일 치러진 제10대 통일주체 대의원 대통령선거에서 2,549명이 투표해 찬성 2,465표, 무효 84표로 대통령에 당선, 그해 12월 21일 취임했으나, 취임 9개월 만인 1980년 8월 16일 마침내 하야하고 말았다.
최규하 대통령의 임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잔여 임기인 1984년 12월 26일까지로 되어 있었으나, 신군부 등장과 정치 기반이 전혀 없어 혼란한 시국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로 당시 여러 말이 회자 되었으나 그는 끝내 입을 다물고 세상을 등졌다. 그의 등과 가슴이 많이 무거웠을 것이다.
◈1980년 통대 대통령 전두환 선출
1980년은 8월 27일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제11대 통일주체 대의원 대통령선거에서 2,525명이 투표해 찬성 2,524표, 무효 1표로 선출되었다. 1978년 7월 6일 치러진 제9대 통일주체 대의원 대통령선거는 박정희가 2,578명이 투표해 찬성 2,577표, 무효 1표 이었다. 둘이 똑 같이 1표의 무효표를 얻었다.
전두환은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한 6일 후인 22일 대장으로 예편하고, 5일 후인 27일 제11대 대통령 당선, 5일 후인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두환은 1995년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지만, 1997년 김대중 정부에서 사면·복권되었다.
대통령에 재임 중에는 광주 학살에 대한 1980년 12월 9일 광주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 1985년 5월 7일 서울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이 일어났다. 1986년에는 권인숙 양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1987년 서울대 박종철 학생 고문치사 사건 등이 있었다.
공자는 “獲罪於天 無所禱也(획죄어천 무소도야), 사람이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했다. 죄 중에서 제일 큰 죄가 사람을 살생한 죄이다. 불교에서는 無間地獄(무간지옥 : 끊임없이 고통 받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에서 수많은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다. 그 후예들이 지금도 떵떵 거리며 ‘나라를 구한다’고 한다.